曾侯乙编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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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侯乙墓编钟曾侯乙墓是公元前5世纪一位曾国国君的墓葬,墓主人叫“乙”。
所谓曾国,没有明确的历史记载。
根据性质明确的曾国青铜器推断,曾国存续于西周早期至战国中期之间。
1曾侯乙墓出土的楚王熊章镈有明确纪年,相当于公元前433年,属于战国早期偏晚。
2400年后,曾侯乙(公元前478—433年)墓内出土了许多无与伦比的瑰宝,那些瑰宝中最具代表性的就是曾侯乙编钟。
编钟是由64件钟按音高秩序编排在一起的打击乐器。
曾侯乙编钟是迄今所知先秦时期件数最多的一套编钟,全套分三层八组悬挂在呈曲尺形的铜、木结构钟架上。
长架长748、高265厘米;短架长335、高273厘米。
上层分三组悬挂钮钟,中层分三组悬挂甬钟,下层则依长、短架分两组悬挂大甬钟。
最大钟通高152.3厘米,重203.6公斤。
最小钟通高20.4厘米,重2.4公斤,总重5000公斤。
编钟制作精良,全部用浑铸、分铸法铸成,并采用了铜焊、铸镶、错金等工艺技术以及圆雕、浮雕、阴刻、髹漆彩绘等装饰技法。
曾侯乙编钟每件钟均具备两个不同的音高,全套编钟音域跨五个半八度。
墓中还出土了用于演奏编钟的木槌和木棒。
这套编钟的钟及钟架、挂钩上共有3755字的铭文,内容为记录诸如音名、阶名、八度组等方面的乐律理论。
中国青铜钟的铭刻自商铙开始,整段成篇的钟铭最早见于西周钟,往往以单件铭和多件组合铭的方式,记录着祭祀、征伐、赏赐、册命、婚媾等事件,以彰显业绩和功勋,并明著后世。
在现知五百多件有铭文青铜钟里,绝大多数的铭文都与音乐无关。
如西周晚期南宫乎钟,甬部铭记:“司徒南宫乎作大林协钟。
兹钟名曰‘无射’”属于鲜见的实例。
曾侯乙编钟则出乎常规,其钟铭的内容除少量为记事之外,绝大多数是直接与编钟及其音乐相关的编号、标音及乐律理论,并有钟声应证和诠注,还有同墓所出的磬铭互通互证。
这是一部声、文对应,文、文相合,内容丰富、金光闪烁的乐律经典,一部迄今仅见的先秦乐律专著。
其铭文的全部内容,在传世的文献中绝无仅有。
曾侯乙编钟1978年,一套在地下沉睡了2400余年的编钟在原襄阳地区随县城关镇西部城郊公社团结大队出土。
专家通过编钟上的铭文鉴定,这是一位名字叫“乙”的曾国君主的编钟,于是,它被命名为曾侯乙编钟。
这个墓葬,被称为曾侯乙地宫。
这次曾震惊中外的文物发掘背后,有许多鲜为人知的故事。
甚至,曾侯乙编钟曾险些毁于爆炸中。
炸出一座“日军地下军事仓库”1977年9月,某单位在原随县城关镇西两座山岗上开山炸石,平整土地,准备扩建厂房。
在施工中,施工人员王家贵发现,在东团坡红色砂岗岩山岗上有一片灰褐色泥土。
他当即感到,这里可能有古墓,并马上向单位负责人郑国贤汇报,随后又向原随县文化馆汇报。
原随县文化馆听到后,并没有回复。
工地便接着施工。
接下来的爆破作业中,工人发现了几件古铜器,郑国贤当即将铜器交到原随县文化馆,并请原随县文化馆派人勘察。
原随县文化馆随后派出一名工作人员到现场,因为该同志不是学习考古的,看了现场后轻率地表态:“这里没有文物,你们可以继续施工”。
事后,该工地继续采用爆破方式施工,并用推土机推土。
1977年12月底,工人施工时在土层中发现一片整齐的青石板。
因为文化馆工作人员曾说这里没有文物,一些工人便猜这里可能是日本人在此修筑的地下军事仓库。
很多人信以为真,并很快在当地传开。
但郑国贤、王家贵等人猜测,这可能是古墓,并由王家贵再次向原随县文化馆报告。
随县文化馆派两人看过后,因拿不定主意,便向原襄阳地区文化局报告。
1978年3月5日,在原襄阳地区文化局邀请下,刘柄和襄阳地区文化考古行政负责人王少泉到现场进行勘察。
当刘柄和王少泉赶到现场时,工地上刚刚放完炮,灰尘飞扬。
刘柄一进现场踏勘后,不禁大吃一惊,他根据现场花白土(注:在开挖墓地回填土时,由于原来土层上下混杂回填,使回填土颜色不一致)情况,断定这是一座大型墓葬无疑。
随后,刘柄便根据现场痕迹,铲出了墓葬的墓口。
经测量,墓葬东西长20米,南北宽16.5米。
刘柄还根据墓葬形制,初步认定该古墓时间处于西汉与春秋之间,并且墓葬规模较大,应该是一座重要的贵族墓葬。
曾侯乙编钟一种双音解释
曾侯乙编钟最为神奇的是一钟双音。
根据编钟上的错金标音铭文所示,敲击编钟的正鼓部和侧鼓部会产生两个不同的乐音,且两个乐音之间相差三度。
如中层3组第5号钟,敲击正鼓部测得频率是427.7赫兹,侧鼓部标音为“宫”,敲击侧鼓部测得频率516赫兹,两音分别相当于现今钢琴键盘上大字4组的“A”(即简谱所记6,La)音
和大字5组的“C”(即简谱所记i,do音),正鼓音比侧鼓音低88.3赫兹,亦即低一个小三度,与羽、宫间小三度音程相符(即6与i之间相差三度)。
这种双音结构使得曾侯乙编钟能够演奏出更加丰富、复杂的音乐,是中国古代音乐文化的重要遗产。
曾侯乙编钟的历史故事曾侯乙编钟是国家宝藏,被誉为“世界第八大奇迹”。
说道曾侯乙编钟,就不得不提到曾国,早在周武王分封时,西周重臣南宫括以及他的后代被分封在曾国,当时称为“随国”。
在那个时候随国可并非小国,而是周王分封在汉水一代姬姓诸侯国中实力最强的一个,主要是用来代替周王室进行监视与牵制周朝南方能控制的边界。
但到了西周晚期,随着周王室力量衰弱,随国附近的楚国也不断崛起了,在熊渠时代,楚国已经开始向四周扩张,逐渐成为争霸的大国。
眼看着楚国逐渐扩张,原本作为周王室的桥头堡的随国也陷入两难之地,要么进行反抗,但自己实力实在无法单扛楚国;要么归附楚国,要么就这样背叛周王朝,也并非容易之事。
于是,随国便开始进行“两面派”。
面对楚国时,随国尊为楚国为老大,口口声声要跟着楚国混;但转过身,当面对周王室又毕恭毕敬,毕竟在王室正统的随人眼中,还是看不起楚人,认为他们只是蛮夷。
当然,楚国也不傻,当楚国怒了,要讨伐随国,随国又开始装无辜,不断打感情牌。
就这样子,随国就这样在周王室和楚国的夹缝中小心翼翼生存着很多年。
曾侯乙编钟,便是随国和楚国交往的产物。
作为随国的最后一位国君,曾侯乙在去世后,楚国的楚惠王便给他特制了一个镈钟作为曾侯乙的随葬品。
在这套一共有65件的编钟里,最大的一件镈钟里,篆刻着铭文:“左右楚王”。
这也说明,随国至少在名义上已经向楚国臣服,安心做它的“马仔”。
不过这也只是名义上,只要能抓住机会,随国还是会牢记自己对周王室的义务,阻止楚国不断坐大。
更是趁着楚国不备,随国还联络汉水的姬姓诸侯国一起讨伐楚国,只可惜最终还是失败。
而被楚国压制后,曾候最终娶了楚国女子芈克为妻,以联姻的方式逐渐真正控制了随国,直到秦国战胜七国后,随国贵族们跟着楚国一起撤退到更南方,最终被秦国统一。
曾侯乙编钟,也见证着随国和楚国两个国家的碰撞与交融。
曾侯乙编钟曾侯乙编钟为战国早期文物~1978年在湖北随县(今随州市)成功发掘。
出土后的编钟是由六十五件青铜编钟组成的庞大乐器~其音域跨五个半八度~十二个半音齐备。
它高超的铸造技术和良好的音乐性能~改写了世界音乐史~被中外专家、学者称之为“稀世珍宝”。
编钟架长748厘米~宽335厘米~高273厘米重4400公斤。
曾侯乙编钟是我国迄今发现数量最多、保存最好、音律最全、气势最宏伟的一套编钟。
钟是一种打击乐器~用于祭祀或宴饮时。
最初的钟是由商代的铜铙演变而来~按其形制和悬挂方式又有甬钟、钮钟、镈钟等不同称呼。
频率不同的钟依大小次序成组悬挂在钟架上~形成合律合奏的音阶~称之为编钟。
钟的大小和音的高低直接相关。
商代的钟为3枚一套或5枚一套~西周中晚期有8枚一套的~东周时增至9枚一套或13枚一套。
春秋战国时期编钟风靡一时~和其它乐器如琴、笙、鼓、编磬等成为王室显贵的陪葬重器。
曾侯乙无枚甬钟战国早期通高71.7—37.2厘米一九七八年湖北随州擂鼓墩一号墓出土湖北省博物馆藏曾侯乙编钟中无枚甬钟共十二件~形制相同~大小不一~仅个别部位纹饰略有差异。
各钟甬、舞、鼓部均与长枚、短枚甬钟相似~但钲部两侧无篆带~无故~饰以统一的单元纹样~每单元纹样内有两条浅浮雕蟠龙~作侧盘卧状。
钟体两面钲部、两侧鼓及正鼓皆有错金铭文。
曾侯乙编钟人形柱战国早期~人形柱身高96厘米半球体底座高35、底径80厘米。
一九七八年湖北随州擂鼓墩一号墓出土。
编钟钟架有六个人形铜柱托举横梁。
图为下层北端较大者。
人形柱头戴圆冠~面容端庄~凝视前方。
身着右衽的长袖上衣和曳地的下裳~细腰紧束宽带~佩剑~掌心向上呈托举状~饰以彩绘。
半球形底座~分上下两圈侧卧着十六条高浮雕蟠龙~每条龙上又攀附若干小龙。
造型繁复、精巧~是古代青铜人像中难得的佳作。
那么这位曾侯乙为何人,史籍无载。
1978年擂鼓墩一号墓,即曾侯乙墓,发掘后~出土了大量文字资料~包括金文、简文、石刻文、木刻文、漆书文等~共12725字~揭开了墓主曾侯乙的神秘面纱。
缚娄国甬钟和曾侯乙编钟的区别缚娄国甬钟和曾侯乙编钟都是中国古代的青铜乐器,它们均具有很高的艺术价值和历史文化意义,但在构造和样式上却有一些不同之处。
下面将详细比较这两个钟的区别。
首先,缚娄国甬钟和曾侯乙编钟在历史时期上有一定的差异。
缚娄国甬钟出土于缚娄国遗址,位于今天的湖南省洞口县缚娄山西麓。
而曾侯乙编钟则出土于湖北省荆门市石首市曾侯乙墓,时间约在公元前433年。
因此,曾侯乙编钟比缚娄国甬钟的历史更加久远。
其次,在外观上,缚娄国甬钟和曾侯乙编钟也有一些明显的差异。
缚娄国甬钟有7只钟,共有5种不同的铭文,每只钟有独立的制作工艺和雕刻图案。
整个甬钟的形制较为简约,没有太多的装饰,但铭文和图案却展示了缚娄国的政治和社会情况。
而曾侯乙编钟则有65只钟,共有8个音阶,每只钟都有纹饰,整个编钟被刻满了花纹和图案,形制较为复杂。
这些纹饰和图案表现了古代中国音乐的美感和丰富性。
此外,在音乐演奏上,缚娄国甬钟和曾侯乙编钟也存在一些差异。
缚娄国甬钟的音域较小,只有几个音域,音质较为单一。
而曾侯乙编钟则具有较大的音域,可以演奏出更多的音高和音调,音质更加丰富多样。
这也意味着曾侯乙编钟可以演奏出更复杂的乐曲,具有更高的艺术表现力。
关于制作工艺方面,缚娄国甬钟和曾侯乙编钟都使用了青铜材料,但在铸造技术上有所不同。
缚娄国甬钟采用的是单件铸造,每只钟都是独立铸造的,然后通过铆钉固定在木质架子上。
这种铸造方式可以更好地保持钟的声音品质和共鸣效果,但制作过程较为繁琐。
而曾侯乙编钟则采用了分件铸造的技术,每只钟由多个铸件组成,然后通过铜钉和铁条连接在一起。
这种铸造方式可以更好地控制钟的音调和音准,但对铸造工艺的要求更高。
最后,缚娄国甬钟和曾侯乙编钟在保存和修复方面也有所差异。
缚娄国甬钟在出土后经过一段时间的沉浸在清水中,以防止青铜氧化和生锈。
而曾侯乙编钟则没有采取相应的保护措施,因此在出土时已经有一些铸铁的铁锈。
为了保护这些编钟,进行了大规模的修复工作,修复后的编钟已经恢复了其原有的音质和外观。
증후을 편종은 지금 중국에서 중량이 가장 무거우며 음률이 가장 완전하고 기세가 가장 웅대한 편종세트이다. 사진에는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의 시민과 관광객들은 후베이성 박물관에서 증후을 편종을 참관하고 있었다.曾侯乙编钟是中国目前重量最重、音律最全、气势最宏伟的一套编钟。
图为湖北武汉的市民和游客在湖北省博物馆观看曾侯乙编钟。
고고·발현 国宝档案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음악가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은 “우리는 고대 그리스 악기가 어떤 소리를 냈었는지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중국의 편종만이 2,400여 년 전의 음악을 우리 앞에 재현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70년대 증후을묘가 발굴되고 묘실이 조금씩 열리면서 호화로운 지하 음악궁전이 세상에 그 놀라운 모습을 드러냈다. 방대한 지하 묘실 음악궁전에는 많은 악기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증후을 편종이 그 중의 명품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편종은 중국 북방 고고학 중 자주 보이는 악기이지만 증후을묘의 편종은 오히려 다양한 기록들을세웠다. 증후을묘는 중국에서 현재 출토된 것 중 수량이 가장 많고 중량이 가장 무거우며 음률이 가장 완전하고 기세가 가장 웅대한 편종세트로‘편종의 왕’으로 불린다.2,000여 년 전 최대 그룹밴드-증후을(曾侯乙) 편종2000多年前最大的组合乐队——曾侯乙编钟톈즈(田芝) VCG1,665kg 무게의 종 거치대가 2,755kg의 종 본체와 부품을 받치며 2,4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폭파되어 사라질 뻔한 천년 고분증후을묘는 2,000여 년 전 제후국 국왕의 고분으로 오늘날 후베이(湖北) 쑤이저우성(随州城) 서쪽으로 2km 떨어진 레이구둔(擂鼓墩) 둥퇀포(東團坡)에 위치해 있다. 쑤이저우시의 원래 이름은 쑤이(隨)현으로 황허(黄河) 유역과 창쟝(長江) 유역이 교차하는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중화민족 시조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고향이라고 전해지며 서주(西周) 시기 제후국 수나라(隨國) 소재지이기도 했다. 쑤이저우성 서쪽 2km에 레이구둔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뾰족한 산들이 기복을 이루고 있는 구릉지대이다. 산맥 동쪽에는 융기된 2개의 원형 둔덕이 있는데 현지인들은 이곳을 퇀포(團坡)라고 부른다. 이 퇀포 2개의 간격은 약 100m로 서쪽 산맥은 구불구불하며 물은 동쪽에서 졸졸 흘러오는 보기 드문 명당이다.1977년 9월 이곳에 주둔하던 해방군 모 공군 레이더 정비공장이 공장 확장을 위해 산을깎고 산을 폭파해 땅을 평평하게 했다. 시공과정에서 둥퇀포의 붉은색 사암 언덕에 지질이 부드러운 갈색 진흙이 나타났고 시공자가 강철 끌로 이물질을 건드렸는데 둥퇀포아래 마치 밝혀지길 기다리는 수수께끼가 있는 것처럼 색다른 소리가 났다.고고학자들이 재빨리 우한(武漢)에서 현장으로 건너왔다. 탄웨이쓰(譚維四)전 후베이성 박물관 부관장은 발파구가 고분 꼭대기와 겨우 80cm였고 한 번더 폭파하면 이 오랜 세월 숨겨져 있던 진기한 고분이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1978년 5월 22일 새벽 5시경 고실의 고인 물을 펌프로 퍼내자 보기 드문‘3실1청(三室一廳)’지하 묘혈이 모두의 앞에 드러났다. 동시에 웅장한 증후을 편종도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웅혼하고 낭만적인 천고의 절향[绝响, 실전(失傳)된 음악]편종은 중국 북방 고고학 중 자주 보이는 악기이지만 증후을묘의 편종은다양한 기록들을 세웠다. 증후을묘는 중국에서 현재 출토된 것 중 수량이 가장 많고 중량이 가장 무거우며 음률이 가장 완전하고 기세가 가장 웅대한 편종세트로‘편종의 왕’으로 불린다.이 편종의 크기는 오늘날 콘서트 홀의 전체 무대를 꽉 채울 만큼 크다. 증후을묘 편종은 뉴종(镈鐘) 19개, 용종(甬鐘) 45개, 큰 박종(镈鐘) 1개의 총65개로 구성되어 있다. 편종 위에는 역사적 사실, 음성기호, 율명(律名) 관계에관한 명문(銘文) 3775자가 새겨져 있으며 그 내용은 선진(先秦) 음률의 중요 자료이다. 전문가 학자는 그것을‘불후한 고대음률학 전적(典籍)’이라고 말한다.그 모양을 보기만 해선 편종을 안다고 할 수 없다. 편종 출토 3개월 후 마침 건군절이라 역사상 첫 증후을 편종 오리지널 연주 콘서트가 쑤이(隨)현 주둔 포병여단 모 부대 강당에서 열렸다. 이는 2,400여 년의 증후을 편종이 세상에 그 웅대하고 낭만적인 천고의 절향을 다시금 들려준 것이다. 콘서트는 2시간 동안 지속되었는데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들은 잠시 이 음악의 여운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초 간의 정적이 흐른 후에야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으며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그 후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35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화이런탕(懷仁堂)에서 두 번째로 연주되었다. 세 번째는 1997년 홍콩 반환 때 연주되었다. 현재 증후을 편종은 후베이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후 지금까지 다시 연주된 적이 없다.증후을은 누구인가?고분 발굴 초기 사람들은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다. 이 고분은 문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묘비도 없으며 묘 안에 묘지명도 없다. 심지어 현지 주민들의 전해진 이야기로도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다행히 묘 안에서 출토된 많은 청동기에서‘증후을작지(曾侯乙作持)’또는‘증후을작지용종(曾侯乙作持用終)’의 명문이 있었다. 특히 편종 거치대 정중앙에 걸린 박종 위에 초(楚)나라 혜왕(惠王)이 증후을에게 선물했다고 명문으로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의심의 여지 없이 이 묘 주인의 이름은‘을’이며 제후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증후을’이라 존칭하는 것이다.하지만 어째서 역사에 증나라(曾國) 관련 기록이 없고 증나라 국왕의 문물이 어째서 수나라 소재지에서 출토되었을까? 이는 줄곧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에게 난제가 되어 왔다. 가장 가능한 해석은 증나라가 바로 <좌전(左傳)>에 기록된 수나라라는 것이다. 이는 동주(東周) 시기에서 유일한 케이스가 아니라 진나라(晉國)가 당나라(唐國)로도 불리고 양(梁)이 위나라(魏國)의 다른 이름이며 여나라(呂國)의 또 다른 이름이 포나라(甫國)이었던 것처럼 증나라, 수나라는 일국(一國)의 두 이름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초나라 혜왕이 어째서 수나라 국왕에게 이렇게 소중한 물건을 선물했을까? 기원전 706년부터 기원전 690년까지 초나라는 여러 차례 수나라를 정벌했으며 이후 50년간 수나라가 초나라에 승복했다. 기원전 506년 초나라 소왕(昭王)이 수나라로 도망간 사건은 양국 관계가 ‘피는 물보다 진한’단계로 진입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기·초세가(史記·楚世家)>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오나라(吳國) 대군이 초나라 영도(郢都)를 쳐들어갔는데 초 소왕이 수나라로 도망치자 오군이 뒤쫓아가 수나라 왕에게 소왕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오나라는 교환 조건으로 한수(漢水) 동쪽의 토지를 수나라에 귀속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국면이 매우 위급해지자 초 소왕은 수나라 공궁(公宮) 북쪽에 숨었고 오군은 이미 공궁 남쪽에 도착했다. 하지만 수나라 왕은 오나라의 위협과 회유에 응하지 않고 초나라 소왕을 내놓을 것을 거절했다. 이로써 초나라에 시간을 벌어주었다.박종 명문 상의 초나라 혜왕 웅장(熊章)은 바로 초 소왕의 아들이며 아버지를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초 혜왕은 양국의 우호관계 표식으로 이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박종을 증후을에게 선물한 것이다.编钟是中国北方考古中较为常见的一种乐器,但曾侯乙墓的编钟却创下了多项纪录:它是中国目前出土数量最多、重量最重、音律最全、气势最宏伟的一套编钟,堪称“编钟之王”。
不朽绝响之曾侯乙编钟El sonido perpetuo de las campanas de Zenghouyi—————作者:闫旭 Yan Xu翻译:小康 Carlos García de la Morena中国礼乐文明的历史悠久,中国古人不仅对音乐表演的程式、编制、形式、所使用的乐器,都有一定的要求;而且也看重乐器与自然界之间的联系,也即乐器的核心制作材料。
他们按主要制作材料将乐器分为金、石、土、革、丝、木、匏、竹八类,并认为 “金石以动之,丝竹以行之,诗以道之,歌以咏之,匏以宣之,瓦以赞之,革木以节之”,追求着“诗言志,歌永言,声依永,律和声。
八音克谐,无相夺伦,神人以和”的至高境界。
Los métodos confucianos para regular la sociedad basados en los ritos y la música vienen de muy lejos en el tiempo. Antiguamente, no solo había requisitos respecto a la forma, compilación y apariencia de las actuaciones musicales y el uso de los instrumentos, sino que también se valoraba la relación entre estos y la naturaleza. Es decir, los materiales básicos para manufacturarlos, que se dividen en ocho tipos: oro, piedra, tierra, cuero, seda, madera, calabaza y bambú. Se consideraba que “el oro y la piedra sirven para moverse, la seda y el bambú para actuar, el poema para expresarse, la canción para cantar, la calabaza para declarar, la teja para alabar, y el cuero y la madera para ahorrar”. Así como la búsqueda suprema de “la poesía que habla de la voluntad, la canción que siempre dice, el sonido que perdura, la ley en consonancia, los ocho sonidos en armonía que no pierden su orden y la unión entre la humanidad y la deidad”.在神话传说中,炎帝的后代殳(Shū)发明了钟。
曾侯乙墓编钟曾侯乙墓是公元前5世纪一位曾国国君的墓葬,墓主人叫“乙”。
所谓曾国,没有明确的历史记载。
根据性质明确的曾国青铜器推断,曾国存续于西周早期至战国中期之间。
1曾侯乙墓出土的楚王熊章镈有明确纪年,相当于公元前433年,属于战国早期偏晚。
2400年后,曾侯乙(公元前478—433年)墓内出土了许多无与伦比的瑰宝,那些瑰宝中最具代表性的就是曾侯乙编钟。
编钟是由64件钟按音高秩序编排在一起的打击乐器。
曾侯乙编钟是迄今所知先秦时期件数最多的一套编钟,全套分三层八组悬挂在呈曲尺形的铜、木结构钟架上。
长架长748、高265厘米;短架长335、高273厘米。
上层分三组悬挂钮钟,中层分三组悬挂甬钟,下层则依长、短架分两组悬挂大甬钟。
最大钟通高152.3厘米,重203.6公斤。
最小钟通高20.4厘米,重2.4公斤,总重5000公斤。
编钟制作精良,全部用浑铸、分铸法铸成,并采用了铜焊、铸镶、错金等工艺技术以及圆雕、浮雕、阴刻、髹漆彩绘等装饰技法。
曾侯乙编钟每件钟均具备两个不同的音高,全套编钟音域跨五个半八度。
墓中还出土了用于演奏编钟的木槌和木棒。
这套编钟的钟及钟架、挂钩上共有3755字的铭文,内容为记录诸如音名、阶名、八度组等方面的乐律理论。
中国青铜钟的铭刻自商铙开始,整段成篇的钟铭最早见于西周钟,往往以单件铭和多件组合铭的方式,记录着祭祀、征伐、赏赐、册命、婚媾等事件,以彰显业绩和功勋,并明著后世。
在现知五百多件有铭文青铜钟里,绝大多数的铭文都与音乐无关。
如西周晚期南宫乎钟,甬部铭记:“司徒南宫乎作大林协钟。
兹钟名曰‘无射’”属于鲜见的实例。
曾侯乙编钟则出乎常规,其钟铭的内容除少量为记事之外,绝大多数是直接与编钟及其音乐相关的编号、标音及乐律理论,并有钟声应证和诠注,还有同墓所出的磬铭互通互证。
这是一部声、文对应,文、文相合,内容丰富、金光闪烁的乐律经典,一部迄今仅见的先秦乐律专著。
其铭文的全部内容,在传世的文献中绝无仅有。
曾侯乙编钟的起源故事
曾侯乙编钟是中国古代钟乐器的代表之一,其起源故事与春秋时期的楚国曾侯乙墓有关。
据传,楚国君主曾侯乙在公元前433年去世后被安葬在今天湖北省荆门市钟祥市的曾侯乙墓中。
曾侯乙墓是一座规模庞大的墓葬,被誉为中国古代墓葬艺术的瑰宝,墓中发现了大量珍贵的文物,其中最引人注目的就是曾侯乙编钟。
曾侯乙编钟是一组由64件钟组成的钟乐器,它们
通过调整不同大小的钟体和击打钟面来发出不同的音调,具有丰富的音色和曼妙的和声效果。
据考古学家的研究,曾侯乙编钟应该是曾侯乙在世时制作的。
据说,在他临终前,他嘱咐家人要为他制作一套钟乐器,用以祭祀祖先和供乐。
于是,为了满足曾侯乙的遗愿,他的家人聘请了一批熟练的工匠来制作编钟。
这些工匠用精湛的技艺将铜锻造成了各种形状和大小的钟体,并将它们精确地调音,使它们可以发出不同的音调。
曾侯乙编钟的制作过程需要经历多个环节,包括铸造、调音、组装等。
考古学家通过对编钟的研究发现,在制作过程中使用了独特的铸造技术,通过在铸造过程中将铜水倒入泥模中,然后敲击泥模,使铜水均匀地填充泥模的各个部分,最终得到形状完美的钟体。
同时,编钟的调音也需要极高的技术要求,需要仔细调整钟体的厚度和形状,以及钟面的大小和位置,以确保编钟发出的音调准确且和谐。
曾侯乙编钟的制作过程和其独特的设计使它成为中国古代艺术
的杰作,对后世的钟乐器制作产生了重要影响。
同时,它也展示了古代中国人民对音乐的热爱和对礼仪仪式的重视,成为中国古代宗教音乐文化的重要组成部分。